[정재수의 고구려 오디세이] 7. 추모왕의 생모 유화부인

유화부인은 성모 마리아와 같은 존재

  • Editor. THE NEWS
  • 입력 2023.03.31 18:32
  • 수정 2023.03.31 19:12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정재수 역사작가
정재수 역사작가

[더뉴스=THE NEWS] 『삼국사기』 건국신화를 보면 추모왕의 생모 유화부인은 화백(河伯)의 딸로 나온다. 하백은 ‘수신(水神-물의 신)’을 가리킨다. 수신은 여성적 생산력의 상징으로 천신(天神)인 남성과 결합하는 형태로 신화체계가 만들어진다. 추모왕은 자칭(自稱) 해모수라 칭한 북부여 왕족출신 옥저후 불리지(弗離支)와 하백의 딸 유화부인 사이에서 태어난다.

하백, 곤연지역 씨족장 옥두진

『유기추모경』에 유화부인의 가계가 나온다. 아버지는 곤연(鯤淵)의 씨족장인 청하백(淸河伯) 옥두진(屋斗辰)이다. 『삼국사기』의 하백은 청하백을 말한다. 곤연은 지금의 요녕성 개원(開原) 일대로 청하(淸河)가 흐르는 지역이다. 또한 『삼국사기』 건국신화에 나오는 동부여 금와왕(2대)의 발상지이기도 한다. 옥두진은 호인(好人)이라는 여성을 통해 딸 셋을 낳는다. 옥유화(柳花), 옥훤화(萱花,), 옥위화(葦花)이다. 이 중 첫째 딸 옥유화가 바로 추모왕의 생모 유화부인이다.

▶동부여 금와왕은 곤연(鯤淵)의 큰 돌을 깨고 나온 난생신화와 유사한 독특한 신화를 가진다. 이는 천신족인 북부여출신의 해부루왕과 지신족인 금와왕이 결합하는 과정으로 이해한다. 금와왕은 혈통상으로 해부루왕과 무관하다.

유화부인은 추모왕을 임신한 상태에서 남편 불리지가 사망하는 바람에 동부여 금와왕에게 일신을 의탁한다. 그리고 추모왕을 낳은 후 금와왕에게 재가한다. 이는 추모왕이 금와왕의 아들 대소에게 핍박을 받고 동부여를 탈출할 때 유화부인이 추모왕을 따라가지 못한 이유이기도 한다. 유화부인은 금와왕과 사이에 해불(解弗), 해화(解花), 해주(解朱), 해소(解素), 해만(解万) 등 추모왕의 이복동생들을 줄줄이 낳는다.

▶신라 화랑의 기원인 선도(仙徒)의 계보를 정리한 『위화진경』(남당필사본)에는 유화부인과 금와왕 사이에서 태어난 또 한 명의 아들이 나온다. 월나국(月奈國-전남 영암)을 건국한 시조 백토(白兎)이다. 월나국은 마한연맹체 소속이 아닌 별도의 한반도 남해안의 고대 소국으로 섬진강문화권을 형성한 포상8국의 시초이기도 한다.

유화부인, 금와왕 발상지 (곤연 : 요녕성 개원) <이미지 정재수 작가>
유화부인, 금와왕 발상지 (곤연 : 요녕성 개원) <이미지 정재수 작가>

부여신으로 추앙된 유화부인

유화부인은 백제 시조 온조(비류 포함)의 어머니인 소서노(召西奴)와 신라 시조 박혁거세의 어머니 파소(婆蘇)와는 전혀 다르다. 두 사람은 전면에 나서 적극적으로 시조들을 이끌며 건국을 주도했다면 유화부인은 후면에서 묵묵히 시조를 격려한 경우이다. 추모왕에게 활쏘기를 가르치고 말을 골라주며 곡식을 건네주고 또한 동부여를 떠나 다른 곳으로 가서 나라를 창업하여 독려한다. 추모왕의 추동(推動)에는 유화부인의 탁월한 지혜와 가르침이 바탕이다.

『북사』 고구려전 기록이다. ‘신묘(神廟)가 두 곳에 있는데, 하나는 부여신(夫餘神)으로 나무를 깎아 부인상을 만들고, 또 하나는 고등신(高登神)으로 시조인 부여신의 아들이다. 모두 관청을 설치하여 사람을 보내 지키게 하니 대개 하백의 딸과 주몽이라고 한다.[有神廟二所 一曰夫餘神 刻木作婦人像 二曰高登神 云是始祖夫餘神之子 竝置官司 遣人守護 蓋河伯女朱蒙云]’

유화부인은 사후 아들 추모왕과 함께 부여신과 고등신으로 추앙된다. 유화부인은 고구려왕실의 상징이자 고구려 사회의 정신적 지주로 승화한다.

길림성 집안의 고구려 국동대혈(國東大穴) <사진 정재수 작가>
길림성 집안의 고구려 국동대혈(國東大穴) <사진 정재수 작가>

▶유화부인은 前24년(추모14) 동부여에서 사망한다. 『삼국사기』는 8월 금와왕이 태후의 예로써 장사지냈다고만 기록하여 사망사유를 밝히고 있지 않다. 그러나 『유기추모경』은 유화부인이 7월7일 밤 복어 알을 먹고 자살하며 이를 애통해 한 금와왕이 10일 동안 식음을 전폐했다고 전한다. 유화부인은 왜 자살하였을까? 덧붙여 기록은 그녀가 자살하기 2개월 전인 5월에 금와왕의 아들 대소에게 겁탈당한 사실도 소개한다. 이에 유화부인은 분한 마음을 다스리지 못해 병이 나고 또한 한 달 후 태기마저 생기자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나이 51세다.

유화부인은 카톨릭의 성모 마리아와 같은 존재이다.

저작권자 © THE NEWS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2024 THE NEWS. All rights reserved. ND소프트
모바일버전